비가 와서였을까요?
공연히 마음 한 켠이 눅눅해졌습니다.
창 너머 초록의 숲으로 모색이 내려 앉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유리창은 어느새 빗물로 흐려지고
창밖의 세상이 흐려진 대신
마음 깊이 숨겨져 있던 풍경 하나 점점 또렸해졌습니다.
일부러 기억해내려 했던 것도 아닌데
아이가 허공으로 날리운 비누방울처럼 어느 순간 떠올랐다간
이내 스러진 그 풍경 하나가 내 영혼의 음계를 지긋이 눌러 버려
모든 생각이 단조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문득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은
되돌릴 수 없는 날들에의 집착일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을 잊지 못하는,
하여 그 빛나는 순간을 좀더 이어가지 못하는 안타까움들이
우리네 이승살이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며 번뇌의 늪으로 이끄는 것이란...
바람이 불 때마다 작은 이파리들을 하얗게 뒤집으며
환호하던 은사시나무처럼 온몸으로 사랑할 수 없었던 순간에 대한 안타까움,
다가서는 인연 앞에서 당당하지 못하고 늘 비켜설 수 밖에 없었던
용기없음에 대한 회한이 시선을 과거의 시간 속에 가두는 것인지도...
작은 풀씨 안에 우리들의 눈을 환하게 만드는
눈부신 꽃의 형상이 들어 있었던 것이라면
우리가 말하는 인연이라거나 운명이란 것도
이미 아주 오래 전에 결정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는데,
우리들의 마음이란 것이
구름이나 물처럼 항상 어디론가 향하여 흘러야 하는 것이라면
지난 시간에 꽂아둔 시선이란 부질없는 일일텐데...
한 순간이라도 시선이 꽂혔던 자리엔 아물지 않는 상처같은 것이 남아서
오늘처럼 비 오거나 습기 배인 날이면 우리들의 생을 옥죄곤 합니다.
한 마디의 짤막한 인사와 맑은 눈물 한 방울,
그리고 낡은 흑백사진같은 흐릿한 풍경 하나 되살아오는
오늘처럼 비 오는 날에는 굳이 문밖에 서지 않아도 내 몸이 먼저 젖습니다.
물먹은 한지처럼 이대로 풀어져
형체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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