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약국의 셔터가 내려지는 밤 아홉시
난 근무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엔가 홀린 사람처럼 약국으로 뛰어 들어가
온장고 속의 쌍화탕을 한 병 사들고 나왔네.
그 알맞은 온기를 두손으로 감싸 안으며
마주오는 바람을 맞으며 언덕길을 내려 오면서
그제서야 움추러드는 어깨에 느껴지는 한기가 이미
하루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지.
아침에 면도를 하는데
입술 주위에 가려움증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출근 하는 차 안에서 룸미러에 비춰본 입술은 이미
벌레에 물린 살갗이 부어 오르듯 작은 물집이 잡혀 있었어.
그래, 난 오래 전부터
내 몸의 이상 징후를 입술에서 찾아내곤 했지.
피로가 쌓이면 몸의 면역체계가 허술해져서
제일 약한 곳부터 바이러스란 놈이 치고 들어오는데
내 몸 중에 제일 취약한 곳이 입술인 모양이야.
조금만 피곤하다 싶으면 영락없이 입술이 부르트거든.
자네가 감기로 누워 있던 며칠 동안
나는 자네의 부재를 인정하기 싫었던지
깊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아니,
내가 잠들지 못한 수많은 이유 중에
자네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자네의 방송을 들으며 조금 슬프고 많이 행복했네.
이렇게 말하는 나를 자넨 이기적이라고 나무랄 지 몰라도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네.
내가 슬펐던 건 자네가 아프다는 사실이고
나를 위로한 건 나 역시도 자네와 같이 아프다는 것이고
나를 기쁘게 한 건 자네가 아픈 중에도
늘 그자리에 있었다는거야.
낮게낮게 가라앉아서
손가락 하나 까딱일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자네가 안타까우면서도
나 역시도 그 시간들을 자네와 비슷한 감정의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네.
오래된 소나무일 수록
그 딛고 선 땅은 척박하기 그지 없다지.
척박한 토양에서 자란 소나무일 수록 청청한 빛을 낸다지.
얼마나 푸르르려고 이리도 아픈 것인가
자넨 슬픔도 기쁨도 저울추의 무게가 같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자꾸 슬픔 쪽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는 것만 같아.
어느 시인처럼 가끔은 내 자신에게 이렇게 속삭이곤 하지.
'나는 얼마나 견딜까?' 하고 말야.
꽃이 피는 날은 짧지만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온전한 씨앗으로 자라서
다음 생을 약속하기까지에는
몇 배, 혹은 몇 십배의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야.
그 시간들을 같은 눈금 위에 올려 놓는다는 건
달관한 자의 시선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긴 자넨 천사니까 가능할 지도 모르겠군
이제 그만 떨쳐 일어 나시게.
자리보전하는 일은 천사의 몫이 못되네.
어제 출근 길에는 달이 하 밝아서
차를 갓길에 세워두고 한참이나 바라 보았네.
향기 고운 장미로 만든 꽃다발 하나 뒷춤에 숨기고
불쑥 자네를 찾아가 놀래키고 싶네만
행여 머리카락 보일라 안개 뒤에만 숨어 있으니...
그저 꽃밭에
앉은뱅이 꽃들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단
그 말 한 마디 전하고 싶었는데
약 기운 을 못이기는지 이야기가 갈짓자로
게걸음 치고 있네.
조금 후에는 다시 출근도 해야 하는데...
친구야,
아프지 말게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