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같이 허둥대며 집을 나섰다
과음한 다음날의 숙취가 깨지 않은 것처럼 온몸이 나른하다
어젯밤 늦게까지 그녀에게 보낼 꽃바구니의
편지를 작성하느라 잠을 설친 것이다
목요일..
회사 근처의 '스마일 꽃집'에서 꽃바구니를 배달하는 날이다
행여 구겨질세라 양복 안주머니에 조심스레 간직한 카드에
무슨 이야기를 썼는지는 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간밤에 썼던 글들은 아침에 다시 읽어보지 않는게 상책이다
몇장의 카드를 찢어가며 수없이 손질을 했건만
아침의 맨정신엔 여전히 유치하게 느껴지고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고칠 시간도 없다
그저 오늘도 변함없이 책상 위에 배달된 꽃바구니에
수줍어하면서도 기뻐할 그녀의 해맑은 얼굴만 그릴 뿐이다
이런 정성을, 이런 설레임을 그녀가 짐작이나 할까..?
꽃집 아주머니는 이 시간만의 낮 익은 손님을 위해 빙그레 웃으며
빨간 장미와 하얀 백합 송이들을 안개꽃과 망사 천으로 멋을 내고 있다
꽃바구니를 받아 든 아주머니의 중학생 조카는 짐짓 눈을 찡긋한다
오늘도 자신의 배달임무에 대한 비밀을 지킨다는 동지의 서약처럼..
2. 赤道의 꽃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 창가로 다가선다
오늘도 어김없이 태양은 다시 떠오르고
사람들은 또 하루의 생존 전투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를
힘차게 시작하고 있다
본격적인 출근행렬로 이어지기는 다소 이른 시간이기에
그 속에서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를 찾아내기엔 어렵지 않다
8시 10분전..
그녀는 이 시간이면 어김없이 그녀 회사의 정문을 향해 나타났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늘씬한 몸매에 잘 어울리는 노란색 원피스가 시야에 들어온다
아침 햇살에 역광으로 반사되는 그녀의 긴 생머리가 유난히 눈부시다
늘 흰색 하이힐만을 신는 그녀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경쾌하기만 하다
그렇겠지..
오늘은 그녀의 백마 탄 기사로부터 예쁜 꽃바구니가 배달되는
목요일이니까..
3. 우연 그리고 운명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은 어쩌면 아버지 덕분인지도 모른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지는 모르지만
마흔 이전엔 절대 장가를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종가집 장손인 철없는 큰아들을 제쳐두고
두 동생을 먼저 시집, 장가 보낸
부모의 마음은 영 편치가 않았던가 보다
맞선을 보자는 수 차례의 어머니의 강요도 소용이 없자 마침내
시골 벽지 학교 교장선생님이신 아버지가 내 하숙집으로 쳐들어 오셨다
어떻게 되어먹은 놈이 종가집 장손의 책임과 의무를 망각하고
부모의 속을 썩이고 있느냐고..?
조만간 회사 때려 치우고 영화나 한편 만들까 해서요..
한국엔 마땅한 맏며느리감이 없어서요..
아니, 장가갈 돈이 없어서요..
노인네 듣기에 민망한 소리만 골라서
온갖 궁색한 변명을 늘어 대는 꼴통에 질리셨는지
돈이 없어서라는 말이 아버지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박봉의 시골 국민학교 교장선생님은 다 큰 아들의 손에
거금(?)의 쌈짓돈만 쥐어주고 내려 가셨다
착한 국민학교 학생처럼 저축의 습관부터 길러야 한다며..
하기야 나는 땡전 한푼 없는 빈털터리다
돈이라는 것이 생기기가 무섭게 카메라 액세서리를 구입하거나
사진, 낚시 장비 잔뜩 짊어지고 산으로 섬으로 떠나야 하는
못 말리는 역마살의 방랑족이니까..
아무 말 없이 내민 계좌개설 신청서와 나의 얼굴을
한번 흘끔 쳐다보고 이내 고개를 숙여버리는 사무적인 얼굴의 그녀
아..!!
순간적으로 강렬한 전류가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흐른 듯 했다
어디선가 오래전부터 희미하나마 낮익은 얼굴..
사실은 자세히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내 가슴에 강렬한 잔상으로 각인된
어떤 여운과 같은 느낌으로서는
막연하나마 이제껏 상상 속으로만 동경해 왔던
18살때의 올리비아 핫세의 사진으로부터 그려왔던
다소 추상적인 이미지의 나의 이상형..
한떨기 백합 같이 청초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한송이 장미 같은 화려함
나의 언어영역으로는 감히 형용할 수 없는 어떤 신비로움..
그러나 난 그녀를 다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마치 나쁜짓하다 들켜버린 어린애 처럼
고개를 숙인 채 도망치듯 돌아서 버렸다
떨리는 가슴으로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잔상으로 남은 그녀의 모습을 꺼내들고
나의 상상력과 기대를 가미하여
내 마음 속의 연인으로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긴 생머리에 하얀 갸름한 얼굴이었지 아마..?
금새라도 눈물 한방울이 떨어질 듯 맑고 큰 눈이었어..
좁은 어깨가 훅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이 갸냘펐던 것 같애..
그런데 어떻게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어떻게 하면 그녀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5. 꽃바구니의 전설
목요일..
오늘도 꽃바구니가 배달되어 있을까..?
그럼 어떤 꽃들로 장식을 하였을까..?
오늘은 어떤 사연이 들어 있을까..?
벌써 몇 달째 매주 목요일이면
어김없이 배달되는 꽃바구니에는
보내는 이의 이름이 없다
동봉된 카드에는 도대체가 알 듯 모를 듯한 소리만..
그나마 영어로 씌어져 있어 무슨 뜻이었는지 헷갈리기만 한다
도대체 누가 보내는 것일까..?
이젠 모습을 드러낼 때도 되었으련만
그는 언제쯤 내 앞에 나타나려고 이렇게 애만 태우고 있는 것일까..?
객장 카운터에 문제의 꽃바구니를 올려 놓고
지난 주 내내 영업부 동료 여직원들이 점심시간에 교대해가며
꽃바구니를 쳐다보는 눈이 수상쩍은 사람에 대해 감시를 폈건만
전혀 진전이 없었다
그는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작정인지도 모른다
6. 늘 애인같은 아내
"꽃 사세요..꽃..!
예쁜 꽃 바구니가 단돈 만원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다 힐끔 뒤돌아본다
백합과 장미의 절묘한 조화로 만든 아름다운 꽃바구니다
퇴근길의 지하철역 입구에 옆 빌딩 지하의 꽃집 아줌마가
아예 노점상을 차렸나 보다
IMF의 불황은 모든 사람을
살아 남기 위한 투사로 만들어가는 중이다
그래..참..!
오늘이 그녀의 생일이다
우리가 결혼한지 10년째 맞는 아내의 생일이다
그녀가 꿈꾸었을 백마 탄 기사는 무심히 흐르는 세월에 묻혀
일상에 찌든 폄범한 샐러리맨으로 전락해 버렸음에도
항상 예쁘게 화장하고 단정한 옷매무새로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여자
참.. 그러고 보니
그녀는 일상복과 외출복의 구분이 없다
집안에서 설거지를 할 때나 동네 슈퍼를 갈 때나
집앞 공원에서 애들이란 놀 때도
항상 화장하고 단정한 외출복 차림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언제나 애인같은 아내로 내곁에 있고 싶댄다
내 생각엔 그것이 그녀가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가 기대했었던 백마탄 기사는
10년의 세월에 무려12킬로가 늘어나며 망가지는 동안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서도
늘 같은 몸무게와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얼굴도 모르는 익명의 남자로부터 배달되었던
꽃바구니들에의 향기에 도취되어
막무가내로 엄마 아빠 졸라서 내게 시집온 그녀
겉치레와 격식을 싫어했던 나의 유별난 고집에
그 흔한 청첩장조차 만들지 않았던 결혼식에서
다이어반지는 커녕 금가락지 조차도 받지 못하고서도
마냥 행복해 했던 나의 천사
오늘 그녀의 35년생을 축하하는 꽃바구니에 행복해하며
생활의 시름을 잊을 수 있는 소박하고 평범한 여자
언제나 애인 같은 아내
난 그녀를 사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