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들짐승이 자기연민에 빠진 것을 본 적이 없다.
얼어죽은 작은 새는 나뭇가지에서 떨어질때
그 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슬퍼해 본 적도 없었으리라.
- D.H. 로렌스
어디선가 메모해놓은 글이라 새삼 정확한 출처를 확인할 방도는 없고. 다만 로렌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들짐승과 같은 생명력과 산사람과 같은 과묵함을 지닌 존재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내심 마음이 설렌다. 항상 자기연민에 대해서는 경멸의 마음을 가져왔기도 하지만.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고찰하듯, '자기/자아'라는 개념은 다분히 부르주아적인 발견물이다. 현대사회에서 자기연민 혹은 자기현시에 다름아닌 기만적이고 추악한 언술의 범람은 어쩌면 이 개념의 태생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2
조셉 로지의 <하인>은 철저히 조롱적이고 파괴적이다. 상류사회의 위선과 무능에 대해 조롱하는 씬들은 너무 노골적일 정도다. 그리고 주종관계에 기반한 인습적인 사회관으로 볼때, 그저 야비하고 뻔뻔하고 제멋대로고 사악하기까지 한 하인 바랫(더크 보가드)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하인 바랫은 특별한 개인적 원한관계도 없이 주인 토니(제임스 폭스)의 삶을 비틀고 마침내 붕괴시키는 인물이다. 외적인 주종관계는 허울에 불과할뿐, 실제적인 주인은 하인 바랫이고, 그는 주인 토니를 길들이며 지배해나간다. 하인이 주인을 지배한다! 주종관계의 완벽한 전도! 경멸적인 언어인 '노예근성'이라는 말대신 이제 '주인근성'이라는 말을 사용해야겠다. 주인 토니는 하인 바렛이 자신의 침실을 사용하는 현장을 잡고 그를 쫒아내지만, 다시 그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지배받기를 자청하며 그의 지배에 안도한다. 그렇다, 주인은 하인의 지배를 원한다!? 어쩔수없는 '주인근성'이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약혼녀의 방문을 받고 주인 토니는 자신의 현실을 괴로워하기도 하지만, 그에겐 그 상황을 전환하고자 하는 의지는 결여되어 있다. 아니 오히려 그는 약혼녀에 의해 어떤 변화가 올까봐 두려워하는데, 그의 약혼녀 역시 주종관계가 전도된 그 집에서는 하인 바렛의 지배에 굴복해야 함을 안다(그녀는 하인 바렛의 조롱적인 키스를 거부하지 못한다).
주종관계의 전도가 주는 카타르시스적 통쾌함과는 전혀 거리가 먼 씁쓸하고 무거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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